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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면을 담다

'사명을 다하여' 하산 작가 인터뷰


여러분은 '달'을 떠올리면 어떤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주기에 따라 차고 기우는 달은 인류가 가장 오랜 시간 상상하고 탐구해 온 천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난 35억년 간, 지구의 생명체가 바라본 달은 매끄러운 지표와 바다로 얼룩진 '달의 앞면' 한쪽뿐이었습니다. 무수한 크레이터(분화구)로 덮여 메마른 달은 지구에선 볼 수 없는 달의 이면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 오랜 시간 보고 느껴온 것일수록 그 이면은 우리의 상상과는 훨씬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나 3호가 촬영하기 전까진 알 수 없었던 달의 또 다른 모습처럼 말이죠.

이번 포스타입 인터뷰의 주인공은 작품을 통해 '일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가, 하산 님입니다. 하산 작가님의 단편은 사랑, 이별, 선택, 운명 등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와 상황을 마치 뒤에서 촬영한 듯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하산 작가님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작가님의 색깔부터, 소재를 선정하고 스토리를 풀어내는 작업 과정까지. 지금 포스타입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보세요.




아래 인터뷰는 '사명을 다하여'를 비롯한 하산 작가님의 단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하산 작가님의 단편은 작가님의 포스타입 블로그 '13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POSTYPE (이하 P): 안녕하세요, 하산 작가님. '포스타입 작가 인터뷰'의 고정 첫 질문입니다. 포스타입 이용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하산 (이하 A): 하하. 언제나 제일 어려운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산이라고 합니다. 제 닉네임을 '핫산'으로 아는 분들도 간혹 계신데 '산에서 내려가다'라는 뜻의 하산(下山,[하ː산])이 맞습니다. 옛날 드라마 같은 데서 은둔 고수인 스승님이 더 가르칠 것이 없는 제자에게 '그만 하산하거라'라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왠지 기억에 많이 남았나 봐요. 동인 활동 시작하면서 언니에게 "하산이란 이름은 어때?"라고 물어봤었는데, 어감이 예쁘다고 해줘서 자연스럽게 '하산'이 되었습니다. 

포스타입 블로그 이름인 '13월'은 어렸을 때 읽었던 글의 제목에서 따왔어요. '13월'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뭔가 만들 때마다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13이나 5같은 홀수를 좋아해요.


P: 작년 가을에 포스타입 블로그를 개설하신 뒤로 다양한 작품을 공개해주셨는데요, 포스타입을 시작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원래는 1차 창작만 하다가 팬창작을 시작하면서 오픈된 공간에서 처음 활동을 하게 됐는데요. 한 번 어떤 것에 빠지면 깊이 파는 성격이다 보니 한창 팬창작을 했을 땐 1년에 600장이 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네요. 그러다 문득 그동안 그린 만화를 한 데 모을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포스타입을 알게 되어서 쓰기 시작했어요.

작품을 쉽게 유ᐧ무료로 발행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지만, 영역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창작을 병행하기 좋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특정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그 캐릭터가 주인공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했던 것 같거든요. 그러고 나니 서서히 제 창작을 다시 하게 됐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면 자유도가 높고 창작자가 중심이 되어 꾸려갈 수 있는 공간이 적합하겠더라고요.

블로그를 개설하고 나선 단축 URL을 제일 유용하게 사용한 것 같아요. 포스트 우측 상단에 공유하기 버튼을 누르면 확인할 수 있는데, SNS에 올릴 땐 짧은 주소가 깔끔하고 경제적이니까요. 유용한 기능이니 다른 창작자분들도 써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포스트 우측 상단 '공유하기' 버튼을 누르면,단축 URL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집착의 낙원


P: '사랑' '사랑니 뺄 때 많이 아픈가요' '할로윈' '그 결혼 하지 마세요' 등 정말 많은 작품이 독자들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10여 편이 넘는 단편 중에 작가님께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가 깊었던 작품은 무엇일까요?

A: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할로윈'이에요.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기도 했고, 저도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으니 늘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예전에는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만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이별을 몇 차례 겪고 나니까 내일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내가 먼저 이 애를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할로윈 자체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입장에서 만든 날이잖아요. 첫 장면이 '서양에서 10월 31일은 떠나갔던 존재들이 돌아오는 날이라죠? 누군가에겐 전부였을 그런…'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사실 사람에게 반려견이 전부일 순 없거든요. 하지만 반려동물에겐 주인이 전부니까요. 누리의 입장에서 쓰인 내레이션입니다. 

누나가 누리에게 '같이 오래오래 살자'라는 말을 해 주는 장면이 있는데, 오래오래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반려인들의 가장 큰 소망인 것 같아요. '떠난 이가 돌아오는 날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들을 위로하는 날이구나' 싶었습니다.

내용뿐만 아니라 구성면에서도 4장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의도에 딱 맞게 연출된 창작물이에요. 이런 SNS에 올리기 적합한 부류의 초단편 만화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최대한 처음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반려견과 이별을 다룬 닮은 꼴 작품 '허비' 역시 4장짜리 만화인데, 스토리를 떠올리자마자 바로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반려견과 이별을 다룬 단편 '할로윈'(왼쪽)과 '허비'(오른쪽)


P: 번뜩이는 영감을 받아 완성된 작품들인 거군요.

A: 하하. 그렇게 그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든 창작물을 그렇게 만들긴 어려워요. '한 숨' 단위로 읽을 수 있는 만화는 한 텀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스크롤이 긴 작품 같은 경우는 먼저 글로 옮긴 뒤 작업을 진행합니다. 언제나 소재 구상까지는 즐겁지만, 그 이후부터 완성하기까지는 지난한 작업이죠.

구상했던 이야기를 실제 창작에 옮기기까지 가장 긴 시간이 걸렸던 건 가장 최근에 공개한 '사랑'이에요. 작업량 때문이라기보단  생각할 게 많았던 소재였습니다.


P: 말씀해주신 '사랑'은 정말 많은 포스타입 이용자의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데요.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랑이라고 하면 상대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을 떠올리지만, 그 방식의 이기적인 면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A: 내가 사랑이라고 해도 받는 사람이 부담이면 그건 그 사람에게는 사랑이 아니죠. 주인공은 남자를 사랑했지만, 남자에겐 그게 집착이었고 '그것'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주인공을 사랑했지만, 주인공의 입장에선 공격이었던 것처럼요. 주인공이 '그것'을 가게에서 산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동물을 돌보거나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외로우니까 뭐라도 키워볼까?'라는 마음이었던 거죠. 연인에게 사랑을 쏟아붓고, 상처 입고, 동물을 키우게 되고, 마지막으로 맞게 되는 엔딩까지 철저히 주인공 입장에서만 그려진 만화라고 생각해요.


P: 작품 맨 위에 "사람은 모두 자기 기준으로 자신만의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명이 있다면, 100가지의 사랑법이 있는 거겠죠."라는 문구를 적어두셨잖아요. 인물의 대사나 지문이 아니라 이렇게 본문에 직접 쓰인 내레이션들로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표현하신 게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하산 작가님 특유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단편 작품들 / '사랑'(왼쪽), '사랑니 뺄 때 아픈가요'(오른쪽)


A: 작품의 중심이 되는 생각을 맨 위에 쓰는 편이에요. 지문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서술도 가능하고, 작품의 도입과 결말이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거나, 끝까지 읽고 난 후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장치로도 활용할 수 있고요. 

무엇보다 제가 캐릭터와 저 자신을 많이 분리하는 편입니다. 주인공도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루고 싶은 소재를 표현하기 위한 일부분이고요. 반면 '사랑'이나 '사명을 다하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관점으로 쓰인 이야기다 보니 (내레이션으로 인물의 감정이나 사고가 드러난) 예외적인 경우네요.


P: '사랑'을 포함해 보편적인 감정이나 평범한 이야기를 작가님만의 색으로 표현하신 작품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A: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적인 것을 비틀어 보면서 소재를 얻는 편이에요. 어제는 저녁에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놀이터가 보이더라고요. 가로등 불빛 아래 목마가 서 있었는데 '저 목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낮이나 해가 쨍쨍할 땐 애들도 있고, 시끌벅적할 텐데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혼자가 되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도,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애들이 괴롭히지 않아서 후련 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비현실적인 소재를 쓸 때도 가급적이면 일상적인 느낌으로 연출하려고 합니다. 인어를 수산시장에서 거래한다든가(인어 사냥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을 아주 평범한 가게에서 산다든가(사랑). 우리가 사는 현실에선 굉장히 이질적인 것이더라도 그 세계 안의 인물에겐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으니까요.


사냥한 인어를 팔기 위해 수산시장을 찾은 사냥꾼 / 인어 사냥꾼


P: 일상의 이면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많은 만큼, 독립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가장 이색적인 작품은 역시 '사명을 다하여'가 아닐까 싶어요. '사명'이라고 하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걸 신의 섭리를 따르는 사제의 관점에서 풀어내신 게 충격적이었어요.

A: 판타지 세계 속에서 가장 대중적인 직업군의 딜레마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마법사, 궁수, 전사, 힐러(Healer·아군을 치유하는 역할)로 구성된 파티가 전투를 벌이며 모험을 하는 게 기본 설정이죠.

이 네 가지 직업군 중에 저는 '힐러'에 주목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장르의 게임을 하면 힐러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흔히 숙련도를 높이 쌓은 힐러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 스킬(능력)을 얻게 되는데, 이 능력의 맹점은 자기 자신은 살릴 수 없다는 거예요. 아군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힐러를 지켜야 하고, 아군을 살려야 하는 힐러는 아군의 뒤에서 끝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모순이 있는 거죠.

힐러가 가진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자신이 섬기는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는 거예요. 생명을 치유하고 되살리는 캐릭터다 보니 많은 세계관에서 힐러를 신의 권능을 빌린 사제로 묘사하는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가장 기본적인 금기니까요. 죽음 또한 신이 내린 것이라면, 힐러는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셈이죠.

'이런 모순 속에서 사명을 다하고 있는 힐러는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저라면 망가질 것 같았거든요. '타인을 상처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연명하는 삶에 지쳐서 오히려 죽음을 쉼이라 여기고 바라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그게 '사명을 다하여'라는 만화로 나왔고요. 


신이 주신 안식을 파괴하는 힐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사명을 다하여'


P: 작품 속 메타포(은유)에 대한 질문도 드리고 싶습니다. 작품마다 인상적인 소품들이 등장하는데요, '집착의 낙원'을 볼 땐 지나간 것을 박제하려는 강박감이 수많은 사진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A: 창작물 안에서 소품이나 디테일을 맞춰 표현하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처음엔 쓱 보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다시 '아, 이거!' 하고 떠올리게 되는 그 느낌이 좋아요.

'집착의 낙원' 같은 경우엔 등장인물 셋 모두가 서로에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자신의 삶에 집착해 피조물들을 만들었고, 피조물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창조주를 잊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죠. 상대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동시에, 그 애정이 집착이나 병적인 감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이 사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순간을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면서 창조주가 그토록 원했던 '사라지지 않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 결혼 하지 마세요'의 오렌지 주스도 그런 맥락에서 넣은 소품었는데요. 본편에선 미래에서 온 딸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주인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주인공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딸을 기다립니다. 외전에선 딸을 낳은 주인공이 커피 대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요. 굳어진 습관이나 기호를 바꾸는 것 자체가 쉽지 않잖아요. 그만큼 주인공이 딸을 사랑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입맛처럼 일상적인 것을 바꾸는 건 사소해 보여도 굉장히 큰 변화이고요. 미래에서 온 딸은 자신을 낳으면 엄마의 인생이 망가질 거라고 했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를 낳고 딸과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명확한 해피엔딩의 뜻을 담았습니다.

'그 결혼 하지 마세요'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많은 딸들이 '아빠와 결혼하지 말고, 나도 낳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한 영상을 보고 그리게 된 만화 입니다. 당신을 위해 그런 말을, 생각을 하는 수많은 딸들이 있기에 행복한 어머니들이 계실 거라고요. 앞으로도 은하와 대표님은 쭈욱 행복할 겁니다.


사랑하는 엄마와 딸을 위해 바치는 '오렌지 주스' 한 잔 / 그 결혼 하지 마세요


P: 그러고 보면 작가님의 작품에는 인물의 이름이 잘 등장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극의 중심이나 시선을 이끌어가는 인물일수록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A: 단편은 이야기가 캐릭터를, 장편은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만화가 끝나면 캐릭터의 이야기도, 무대도 함께 끝난다고 생각하고요. 장편과 다르게 단편은 캐릭터가 속한 이야기 자체에 무게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캐릭터의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호칭을 넣는 게 꼭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사랑니 뺄 때 많이 아픈가요'의 '썬' 정도인 것 같네요. 캐릭터의 본명인 '희선'에서 파생한 별명인데, 희선이가 짝사랑하는 친구와 희선이 서로 애칭을 불러줄 정도의 각별한 친구 관계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정도로 친한 사이라면 우정이 깨질까 두려워 쉽사리 마음을 전할 수도 없겠죠.


P: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드신 캐릭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A: '희한한 연구실'의 D 박사요. 매회 다른 안경을 쓰고 나오는데, 그릴 때마다 '이번엔 무슨 안경을 씌울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표정뿐만 아니라 많은 것이 가려진 인물이기도 해요. 인간성을 배제하기 위해 박사의 과거나 배경을 전혀 공개하지 않기도 했고요.

D 박사는 '희한한 연구실'에 나오는 유일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만화를 보시면 정면 연출이 많고 상대역이 꼭 등장해야 할 땐 아예 그림자로 처리한 걸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작품 속에 있는 캐릭터'라기보다 만화를 보는 독자와 대화하는 전지적-관찰자의 역할에 가깝습니다.


D 박사의 사소한 진실 하나. 희한한 연구실은 박사 개인의 소유라고 합니다. / 희한한 연구실


P: 단편이 주는 여운도 크지만, 워낙 캐릭터나 스토리가 강렬해서 외전이나 장편 리메이크를 기대하게 되는 작품들도 많은데요. 혹시 공개된 작품 중에 연재를 구상 중이신 작품도 있을까요?

A: 제가 바다와 판타지 소재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인어 사냥꾼'은 아이디어 스케치 수준으로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형식은 아니고 옴니버스(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를 한데 묶은 장르) 스타일에 가까워요. 인어 사냥꾼이 만나는 다양한 인어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언젠가는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외전 형식으로 더 다룰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왕의 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충신 시리즈'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왕의 기사'에 나오는 왕과 대립하는 국가의 왕이라든가, 주인공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한 오라버니들처럼 각기 다른 신하와 주군이 주인공이 되면 흥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희한한 연구실'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이 있어서 장편화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생각해둔 발명품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도 하고, 바로바로 그릴 수 있는 작품이다 보니 '다음 회가 나오나요?'라는 질문에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염두에 두고 그리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론 '인어 사냥꾼'과 '희한한 연구실'의 냉소적인 분위기가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에 큰 굴곡이 없는 주연 인물도 그렇고... 두 개 모두 제 취향이 많이 들어간 만화라 그런가 봐요. (웃음)


P: 무겁고 진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부터 '내게 필요 없는 마법'처럼 톡톡 튀는 개그 작품까지, 장르 스펙트럼이 정말 넓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소재나 장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제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여운'입니다. 예를 들어 상실이 소재가 되는 작품 같은 경우엔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소중함'이 주는 여운을 담은 거죠. 대개 지나간 것, 상실, 이별,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것을 많이 다뤄서 느낌으로 치자면 다소 무겁고 축축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에서 부모님이나 저보다 앞서 인생을 사셨던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 이런 게 인생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보지만, 결국은 그 과거를 지나왔기 때문에 현재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후회가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란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대중에게 보일 상업작이었다면 (이런 내용이나 소재의 작품은)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포스타입 블로그 자체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위해 만든 공간인 만큼 취향이 자유롭게 반영된 작품을 공개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이런 결의 이야기를 함께 좋아해 주시는 분들께 긍정적인 반향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보면 저도 유쾌한 이야기와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무거운 이야기들이 많았네요. 대책 없이 유쾌하고 행복한 이야기도 정말 좋아합니다.


한 번 말했다. / 내게 필요 없는 마법


P: 오랫동안 창작 활동을 해오신 만큼 힘드셨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때 작가님의 창작 활동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A: '더는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즈음에 어떤 독자분께 택배를 하나 받았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 제 그림이 생각날 때마다 관련된 물건을 조금씩 모았다면서 편지와 함께 보내주셨더라고요. 그때 따뜻한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걸 가장 크게 느꼈습니다. 안에 든 편지를 붙잡고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음을 전하는 데 용기와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독자분들이 표현해주시는 응원과 지지에 큰 힘을 받는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응원 한마디에 힘입어 그 작가분이 다시 작품을 시작하실 수도 있다고요. 누군가가 자신의 편이라는 건 창작자에겐 큰 원동력이 되거든요. 가끔 '몇 년 동안 작가님 작품을 봐왔다. 응원한다'라는 메시지를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독자분들이 정말 제 동료나 전우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최근엔 어떤 독자분께서 '사랑'을 보시고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이 만화를 보고 위로를 받아서 방 청소를 했다"는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뒷맛이 씁쓸한 만화라고 생각했는데, 위로를 받았다고 해주시니까 많은 감정이 들더라고요. 그분께서 지금은 더 편한 마음이셨으면 좋겠어요. 남겨주시는 모든 댓글과 메시지에 일일이 표현을 할 수 없어 죄송하지만, 많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P: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많은 독자분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마지막으로 준비 중인 작품 계획이 있다면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앞으론 어떤 작품으로 하산 작가님을 뵐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A: 최근 SNS를 통해 '리퀘박스(독자들에게 온라인 설문조사 형태로 소재를 추천받는 것)'를 열었는데, 새로운 작품을 하고 싶어서였어요. 일상적인 이야기를 비트는 것을 좋아하는데 제가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몫은 한 사람 몫뿐이잖아요. 소재와 주제 면에서 새로운 자극이 있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많은 독자분께서 흥미로운 소재와 단어들을 보내 주셨고, 읽으면서 얼른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둔 것은 아니지만 장편은 체력 소모가 크기도 하고 볼륨을 조절해야 하는 문제도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단편 창작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또 개인적인 환기를 위해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아지트같은 공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주기적으로 포스타입에 단편을 그려 올릴 예정입니다. 계속 다양한 만화로 만나뵐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응원해주시는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하산⛰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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